The Lost Symbol

February 5, 2010 by jasonfolio

Author: Dan Brown

신밧드가 등장하고,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 등장하는 천일야화가 아닌, 일일천화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한 댄 브라운의 신작 ‘로스트 심벌’. 결론부터 얘기할까?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주는 전작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만큼 탄탄한것은 여전하지만, 전작들인 ‘천사와 악마’, ‘다빈치코드’, 그리고 ‘로스트심벌’ 로 이어지는 획일화된 이야기의 형식에는 이제는 지쳐버렸다. 그리고 이야기 곳곳에서 드러나는 댄 브라운의 ‘신의 영역 건들여보기’ 시도 또한 실패했다. 단 하룻밤사이 벌어지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이야기를 처리하는 솜씨는 여전히 훌륭했지만, 핵심적인 사건으로의 전개상 반드시 필요한 설정들은 너무도 억지스러워 보여 댄 브라운을 이야기를 아주 자~알 꾸며대는 구라꾼이상으로는 도저히 볼수없게 만들었다. 전세계의 독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사기성 억지설정이 ‘로스트심벌’ 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 절로 아연실색 할밖에…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February 5, 2010 by jasonfolio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신웅진 지음.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시절, 지은이가 외통부의 YTN 출입기자 신분으로 만나본 반총장의 인품에 반해 책을 내게 되었노라고 책 겉면 소개에서도 밝혔지만, 이 책의 지나친 치우침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은 너무나도 천편일률적인 반총장에 대한 사부곡 꼴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내용의 요지는 간단하다. 어려서부터 너무도 성실했고, 반듯했으며, 형제간의 우애도 좋을뿐더러, 부모님께 효도했고, 누구하나 반총장을 대하고 난후에는 그의 인품에 반하지 않을수 없다는, 한편의 영웅전을 읽고난후의 기분이다. 저자 신웅진은 지독한 반빠라고 얘기한대도 과하지 않을것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대한민국의 경사이고 자랑이라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인품을 깍아내리고자 하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세계의 지도자라는 유엔 사무총장의 자리는 아무나 오를수는 없는 자리이고 저자의 주장대로 평생을 성실과 노력으로 살아오신 반총장의 인생과정을 폄하하고픈 생각도 전혀 없다. 다만, 이미 밝혔듯이 한사람의 인생에 대한 얘기를 서술하면서 우상화의 최고봉에 오르신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님의 전기를 대하고 난후의 감상도 아마 비슷하지 않았을까? 혹시나 대할 기회가 된다면 말이다.

[공자] 공자가 살아야 중국이 산다

February 4, 2010 by jasonfolio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일본 = 콘텐츠강국’이라는 등식이 우리나라 창작인에게 받아들여진다. 서점 한쪽을 다 차지하고 있는 일본소설, 넘쳐나는 일본드라마 동영상, 그리고 소장하고픈 각종 캐릭터 상품들. 그런데 그 콘텐츠강국 대열에 중국이 나섰다. 중국은 그 많은 사람, 그 오랜 역사에서 배태된 수많은 ‘스토리’의 콘텐츠가 무궁무진하게 포진하고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한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중국에선 놀랍게도 ‘공자 선생님’을 영화로 만들었다. 언뜻 보아 “돈돈돈”하며 오직 경제성장에만 함몰된 중국인을 정신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한 국책 영화(주선율)로 만들어진 따분한 문예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콘텐츠로서의 중국의 잠재력’을 십분 보여준 영화가 되어버렸다. 공자가 누구이고,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소개한다.

공자, 중원에서 길을 잃다

공자는 기원 전(前) 사람이다. 무려 2,500년 전 사람이란 말이다. 그 당시에 무슨 주민등록 제도가 있었고, 개인신용 정보가 제대로 있었으리요. 후대에 만들어진 여러 문서 등을 통해 보자면 공자는 기원전 551년경에 중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사료된다. 그의 생몰연대는 주로 사마천의 <사기>와 공자가 저술‘했다는’ <춘추>를 후세사람이 주석을 붙인 책자를 통해 부분적으로 고증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하튼 아주 옛날 사람이다. 그가 살던 시절은 중국역사에서 이른바 ‘춘추(春秋)시대의 말기, 전국(戰國)시대로 넘어갈 무렵’이다. 중원 땅에서 오랫동안 주(周)나라의 천자(天子)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각 지역의 제후들이 제각기 세력을 키우며 ‘보스=황제’를 꿈꾼다. 그래도 주 천자의 지위는 받들어진다. 그게 춘추시대이다. 그런데 제후국 중 제나라 환공의 실력이 엄청나게 확장되면서 ‘천자’까지 얕보는 시대로 접어든다. 바로 ‘전국’시대의 도래다. 전쟁이 날마다 일어나던 시절이란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인의예지’ 즉, 도덕을 중시하던 공자로서는 감히 천자를 업신여기는 세파를 크게 우려하여 도덕성 회복을 주창한다. 그는 자기의 학당을 열어 제자를 불러 모아 도덕론을 설파하고, 목민관의 자세를 울부짖은 것이다. 한 나라에서 올바른 정치론을 설파하다가 대접 못하면 제자를 이끌고 이웃나라로 건너가고, 그곳에서 뜻을 펼치다 좌절되면 또 다시 짐 싸들고 옆 나라로 가고…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에 그의 도덕론은 ‘넘버 원’이 되려는 제후국 군주에겐 사치스러운 구두선일 것이다. 공자는 그렇게 살다가 숨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중국역사에서 공자는 거듭 되살아나고, 거듭 선양되며 절대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라선다. 물론, 모택동의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또 한 차례 공자는 ‘상갓집 개’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오늘날 중국이 경제성장을 거듭하며 또다시 ‘도덕적 상징’으로 주목받게 되며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공자, 아바타를 몰아내다

공자는 지난 달 중국에서 개봉되었다. 중국에선 전국 극장가에서 <아바타>가 돈을 긁어모을 때였다. 중국당국은 서둘러 <아바타>의 상영을 중지시키고 중국영화 <공자>의 상영을 강요한 것처럼 보도되기도 했다. 중국영화시장의 상황을 아는 사람은 일견 이해할만한 사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바타>가 손해 본 것은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따오판’과 불법동영상 때문에 할리우드영화사들을 절망시킨 나라가 바로 중국이었다. 그런데 <아바타>는 한 달도 안 되어 엄청난 중국 돈을 긁어모아주었다. 그러면서 진짜 돈 되는 3D상영은 계속 상영하게 해 주었으니 할리우드 입장에선 명분도 서우고 실속도 챙기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환한’ 미래를 보장받은 셈이다. 문제는 바통을 건네받은 <공자>이다. 영화 <공자>는 상영 첫 주말부터 논란이 일었다. 영화사측은 3800만 위안을 벌어들였다고 발표했지만, 전국극장가 수익현황을 체크하는 영화당국의 공식발표로는 2800만 위안이었다. 무려 1000만 위안을 뻥튀기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차이는 결국 중국영화시장의 어수선한 현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집계방식과 집계대상, 그리고 무엇보다 상영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시스템적인 착시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이 영화는 중국에선 대박흥행의 기준인 1억 위안을 곧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제작비는 1억 5천만 위안이니 아직은 손해인 셈이다. 하지만 더 벌어들일 것이고 해외 수익도 남아있다. 이 영화가 1억 위안을 넘어선다면 중국 여성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1억 고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감독 후메이는 장예모, 진개가와 같은 이른바 ‘5세대 감독군’이다. 그동안 TV드라마를 주로 연출했다. <옹정왕조>,<한무대제>,<교가대원> 등의 역사드라마는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공자, 대작영화로 만들어지다

제작비가 1억 5천만 위안이라면 오우삼의 <적벽대전>보다 많은 셈이다. 할리우드 스타 주윤발의 몸값이 아주 높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공자>의 스펙터클한 제작규모는 짐작할 수 있다. 촬영, 미술, 편집 등 제작 스태프도 화려하고 스펙터클 영화로서 볼거리도 풍성하다.

공자, 논란을 야기하다

영화 <공자>가 공개되면서 곧바로 논쟁이 일었다. 논쟁은 삼국지 영화에서 나오는 ‘사실과 진실’같은 역사문제부터 시작되었다. 공자가 과연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런 사람이 있었나? 같은 역사해석 문제 말이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신뢰할만한 2,500년 전 기록이 거의 없는 고(古) 시대 인물의 행적을 고증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주로 공자의 어록인 <논어>와 사마천의 <사기>에 서술된 기록에 기대어 영화 <공자>의 맹점을 해부한다. 몇 가지 소개하면 이런 것이다.

- 공자, 손자만큼, 제갈공명만큼 병법을 안다

영화 <공자>에서는 놀랍게도 <삼국지 적벽대전>에서나 만나봄직한 대규모 전투 씬이 몇 장면 나온다. 노나라와 제나라가 군사적 시위를 목적으로 연 외교회담인 ‘협곡지회’와 공자가 노나라의 권신들을 일소하기 위해 펼치는 대규모 숙청작전인 ‘타삼도 전투’ 등은 중국역사서에 나와 있다. 공자가 그 때 그 현장에서 군사적 전략을 짰는지, 실제 전투 지휘봉을 잡고 칼을 휘둘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확실히 할리우드 영향을 너무 받은 것이 티가 난다. 과연 2500년 전 전쟁의 규모가 그리 컸냐는 것이다. 수백 명 단위의 싸움이 제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어쩌겠는가 중국콘텐츠의 진짜 특징은 ‘과장과 허풍의 미학’이니. 공자 집안은 무인(武人) 가계였고, 공자는 줄곧 육예(六藝-활쏘기, 말 타기가 포함되어 있다)를 주장하였으니 영화 속 내용이 전혀 허황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 공자, 미인계에 대처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자견남자’(子見南子) 부분이다. 공자가 정치적 이상을 펼치기 위해 천하를 돌아다니다 한 번은 위나라 경공의 부름을 받는다. 그곳에서 위경공의 첩(왕비)인 ‘남자’(南子)라는 여인네를 접견한다. 공자의 공식어록집이며 지난 2천 년간 아시아 정신문화의 바이블로 여겼던 <<논어>>에는 이 만남과 관련되어 딱 한 구절이 나온다.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予所否者 天厭之天厭之”이다.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공자선생이 남자를 보러하니 제자인 자로가 마뜩찮았다. 공자는 맹세하여 말하길, 그런 짓을 했다면 하늘이 싫어할 것이다. 정말이지 하늘이 싫어할 것이다.” 이게 웬 말인가. ‘남자’가 도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남자’는 당시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여장부이다. 아마도 패리스 힐튼이나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능가하는 스캔들 메이커였을지 모른다. 영화에서는 젊고 아름다운 위 경공의 여자 ‘남자’가 경공의 아들(태자)까지 깔보며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 시절 감히 여자가…. 그러하였으니 세상엔 온갖 나쁜 소문이 나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감히 신성한 종교지도자와 진배없는 공자선생을 은밀히 만난다니 제자들이 펄쩍 뛸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실제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고, 어떤 이야기가 나돌았는지 알 수 없다. 공자 선생이 대인배이고, <색계>에서 봄직한 미인계에 감히 놀아날 위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란 여인네가 진짜 공자를 너무나 존경하여 한번 만나보고 가르침을 받고 싶었었다면… 어떤 대화가 오고 갔을까. 다시 <논어> 문장을 해석하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予所否者 天厭之天厭之” “공자선생님께서 ‘화냥년’ 남자를 만났다니 제자 자로가 불쾌했다. 선생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해명하셨다. 그런 (이상한) 일은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하늘이 날 벌 할 것이다.” 혹은 “(그 여자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나쁜 여자 아니다. 만약 나쁜 년이면 하늘이 벌할 것이다. 아니면 하늘도 그런 세평을 싫어할 것이다.)

사실 자견남자’(子見南子)와 관련하여서는 많은 해석이 있어왔지만 그다지 중요 논쟁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중국여배우 ‘주신’이 등장하면서 조금 에로틱한 상상력이 (적어도 영화 관람객에게는) 주어지면서 ‘성인군자’ 공자의 행동거지에 대한 창의적 논쟁이 인 것이다. 혹시 극장에서 이 장면을 보면 공자 어르신네와 ‘남자’의 대화를 귀담아 듣기를 바란다. 그 여자의 다음 대사는 중국에서도 유행어가 되었으니 말이다.
“당신은 인자애인(仁者愛人-인자로운 사람은 타인을 사랑한다)이라고 했는데 그 말에는 나같이 평판 나쁜 여자도 포함되나요?”

乘(승)과 팔일무(八佾舞) 문제

이건 굳이 번역 문제라기보다는 중국 옛날 이야기를 현대식으로 만들다보니 생기는 넌센스에 가까운 문제이다. 영화에서 회맹을 앞두고 공자가 제후를 ‘경호’하기 위해 전차를 수배하는 장면이 있다. ‘전차 500승’을 내놓으라고 이야기하는데 자막은 “말 500마리를 내놓으시라고 나온다. 중국 고대사에서 전차를 이야기할 때 승(乘)은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 1대’를 의미하는 세트 단위이다. 그러니 전차 500승이라 하면 말 2천 마리를 내놓으란 말이다. 이런 것과 관련하여 또 흥미로운 것은 극중에서 노나라의 권력가 집에서 빨간 옷을 입은 무희들이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팔일무’(八佾舞)이다. 8명씩 8줄로 64명이 춤을 추는 것이다. 고대 중국예법에는 천자만이 팔일무(64명), 제후는 육일무(6*6=36명), 제후의 신하인 대부(大夫)는 사일무(4*4=16명)의 춤이 공식적으로 허락된 오락의 규모였다. 그런데 감히 신하된 자가 팔일무를 추다니.. 공자선생은 몹시 언짢아서 한 마디 한 게 <<논어>>에 나온다.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공자선생님이 노나라의 대부 계손씨에 대해 평하길 그 놈은 자기 집에서 감히 (천자가 즐기는) 팔일무를 추게 했다. 그런 짓을 능히 할 놈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

공자는 춤추는 것에서까지 규칙을 들먹이는 꽤나 고리타분한 형식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는 문구이다. 물론, 아주 좋게 해석하여 신하된 자의 마음가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사라고 보면 된다. (영화 보면서 무희들이 몇 명인지 세어보기 바란다)

그 외 이 영화에서는 <논어>에서 나온 몇몇 경구가 공자 입에서 술술 나온다. 다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명문이다. 자녀교육에 관심 있다면 아이들과 함께 <공자>를 보고 아동용 <논어 만화책>이라도 선물하면 좋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공자, 한국에서의 공자

20년 전 즘 싱가포르에서 한 미국인 틴에이저가 스프레이로 자동차에 낙서를 하여 놀랍게도 ‘외교문제’로 비화한 적이 있다. 길거리에 껌을 뱉어도 거액의 벌금을 문다는 싱가포르에서는 이 미국인 소년에게 태형(곤장을 치는 것!)을 선고했다. 이슬람 사회도 아닌데 말이다. 미국에서는 야만스럽다고 항의했지만 싱가포르는 ‘아시아적 정신문화’를 내세우며 기어이 매질을 했다. 그 때 즈음하여 서구학계에서는 아시아 국가들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유교적 전통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관심의 대상은 주로 ‘한국-싱가포르-대만-일본’ 이었다. 그리고 <주유소 습격사건>이란 영화가 나올 즈음해서 한국에서는 도올의 공자강의가 화제가 되었고 (도올에 대한) 논쟁이 격하게 일었다. 그러다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몇 년 전에 CCTV에서 우단 이란 여교수가 진행한 <논어심득>이란 논어 강의가 초특급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중국에서도 경제성장과 함께 국민성, 도덕성에 대한 – 쉽게 말하자면, 돈을 버니 가슴 어디 한 쪽이 휑하니 뚫린 느낌- 각성이 일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런 영화도 나온 것이다. 중국은 국가적 사업으로 전 세계에 ‘공자학당’을 지어 ‘공자를 내세워’ 아시아적 유교도덕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물론 중국어 보급과 중국국가이미지제고가지 겸해서 말이다. 6년 전 서울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280여 개의 공자학당이 운영 중이란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에서 새로운 복권(로또)이 하나 나왔는데 공자를 메인 디자인으로 한 공자복권이란다. 공자 어르신네의 금과옥조 같은 명언을 포함시킨 로또가 발행된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논란에 휩싸였다. 정말 중국스런 발상이다.

참, 우리는 전혀 모를 이야기이지만 중국에서는 영화 속 공자의 발언이 중국 공산당, 혹은 중국의 정체성과 관련된 수준 높은, 즉, 정치적 함의가 다분히 내포된 많은 부문이 있었단다.

“국민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길이오…” 뭐 이런 공자 선생님의 당연한 이야기가 아주 특별하게 들리는 시대에 우리가 산다는 것이다. 한국도, 중국도 말이다.

공자가 살아야 중국이 살고, 한국이 살고,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박재환 2010-2-4)

출처: 박재환의 블로그

[글로벌 아이] 도요타와 삼성전자의 ‘1등과 2등 사이’

February 4, 2010 by jasonfolio

2일 오전 11시40분 도요타 홍보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나고야(名古屋)의 도요타 본사에서 오늘 오후 1시30분부터 리콜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겠으니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도쿄역에서 나고야역까지는 신칸센 중 가장 빠른 열차 ‘노조미’를 타도 1시간43분. 그 밖의 이동 시간 등을 감안하면 시간에 맞추는 건 100% 불가능하다. 언제나 합리적이고 완벽해 보이던 도요타 직원이 그러는 건 처음 봤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가속페달 결함으로 인한 도요타 승용차의 리콜 규모는 전 세계 1000만 대에 달한다고 한다. 정말 세상 일 모르는 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품질 신화’ ‘일본 제조업의 자존심’이라며 누구나가 치켜세우던 도요타가 이 지경에 놓이게 됐으니 말이다.

기업에는 2등에서 1등이 되려 할 때와 1등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전략이 다르다. 1등을 따라잡으려는 2등 기업의 제일 큰 가치는 신속성과 효율성이다. 나머지는 1등 뒤통수만 보고 달리면 된다. 그러나 1등이 된 순간부터는 갈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길을 뚫기 위해 첨병도 파견하고, 호박인지 수박인지 이것저것 다 찔러 봐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신속성도 떨어지고 비용도 여기저기서 발생하게 마련이다. 2등 시절과는 다른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난 도요타 리콜 사태도 같은 맥락에서 본다. 도요타는 늘 2위 그룹이었다. 1등에는 제너럴모터스(GM)라는 훌륭한 선생님이 있었다. 가야 할 목표와 길이 뚜렷이 보였다. 도요타로선 비용 절감을 위한 ‘가이젠(개선)’에만 몰두하면 됐다. 그러나 2007년 GM을 누르고 1등이 된 순간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1등 유지를 위해선 가이젠뿐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가이카쿠(개혁)’가 요구된 것이다. 이건 도요타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1등을 지켜 내기 위해선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본의 한 업계 관계자는 “100%의 경영 자원을 가이젠에 두던 도요타가 1등 등극 후 ‘가이젠 70%, 가이카쿠 30%’로 분산하는 과정에서 생긴 혼란”이라고 규정했다. 2등 때는 걸러지던 실수들이 1등이 된 뒤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1등 기업은 힘들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삼성전자의 세계 1등 전자업체 등극 소식이 들려온다. 소니를 비롯한 1위 그룹에 뒤처져 있던 시절 삼성전자의 최대 강점은 신속성과 효율성이었다. 도요타와 같았다. 소니처럼 ‘불확실한’ 분야에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안 써도 됐고, 1등만 추격하면 됐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한 ‘정찰비용’도 들게 됐다. 의사결정의 신속성도 예전 같지 않을 공산이 크다. 이제는 2등이 아닌 1등의 위치에서 어떻게 싸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자칫 체질 전환에 실패하면 도요타꼴이 날 수 있다.

따라서 난 도요타 사태를 ‘일본 제조업의 붕괴’로만 재단하는 건 잘못됐다고 본다. ‘1등이 되기보다 1등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평범하지만 무서운 진리는 어느 나라, 어느 기업에도 예외가 없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
김현기 기자 [luckyman@joongang.co.kr]

출처: Joins.com

불신지옥 (2009)

January 29, 2010 by jasonfo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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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or: 이용주

봉준호감독의 ‘살인의 추억’ 연출부출신으로 그의 첫작품인 ‘불신지옥’을 만든다. 각본도 그의 것이고… 어설픈 한국형 호러영화를 많이 보아와서인지 그닥 큰 기대는 안하고 봤었지만, (제목에서 느끼는 촌스러움도 한몫했고…) 의외로 깔끔하다. 남상미의 연기도 극의 역활에 녹아들어 차분했지만, 엄마역의 김보연의 연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런것이 연기의 연륜인가… 딸 나이 또래의 어린연기자들 속에서 무게중심을 잡아주는듯… 제30회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상기작품으로 여우조연상 후보로 올랐지만, 박찬욱감독의 ‘박쥐’ 에서 열연을 한 김해숙에게 돌아갔다.

Leonard Bernstein (1918-1990)

January 17, 2010 by jasonfolio

 

미국 음악역사의 자긍심
레너드 번스타인

1987년 7월 미국의 탱글우드 페스티벌. 학생 오케스트라와 한창 리허설 중이던 당시 69세의 노(老) 지휘자가 휴식 시간에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작곡가들은 나를 진정한 작곡가로 여기지 않고, 지휘자들은 나를 진짜 지휘자로 생각하질 않아. 게다가 피아니스트들은 나를 피아니스트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업종 분화와 전문화가 미덕으로 정착한 클래식 음악계에서 ‘만능 음악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토로했던 주인공은 레너드 번스타인입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인기 뮤지컬 작곡가이면서 동시에 교향곡과 미사곡 등 진지한 클래식 음악을 여럿 남겼고,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던 명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이 다재다능한 음악인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노릇입니다. 1958년부터 14년간 뉴욕 필하모닉에서 <청소년음악회>를 진행했고, 1972년에는 모교인 하버드 대학에서 강연을 맡아 ‘대답 없는 질문’이라는 책으로 묶어냈으니 방송인이자 교육자라고도 불러야겠네요.

장르와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예술혼
1918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난 번스타인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계 집안 출신입니다. 조부는 저명한 랍비였고, 아버지는 가게 점원에서 출발해서 가발과 미용 제품을 만드는 경영자로 성공을 거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유대교와 탈무드를 뼛속 깊이 새기며 자라난 번스타인의 음악 입문은 상대적으로 늦었습니다. 10세 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지만 쇼팽과 바흐의 쉬운 작품은 거뜬히 소화할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하지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클래식 연주회에 가본 것도 15세가 되고서였습니다. 번스타인은 벤자민 프랭클린과 존 F. 케네디 대통령 등을 배출한 300년 역사의 명문인 보스턴 라틴 스쿨에 1929년 진학할 정도로 빼어난 성적을 보였습니다. 학문의 길을 충실히 걷기를 바랐던 아버지와 음악에 뜻을 두고 있던 아들은 때때로 충돌을 겪기도 했지요. 그는 “아버지가 피아노 교습비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웃이나 친구 집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배워갔다”고 술회합니다. 흔히 아슈케나지로 불리는 동유럽 유대인에게 음악인이란 결혼식과 잔치에서 연주하면서 푼돈을 버는 거리의 악사에 불과했습니다. 훗날 음악가로 대성하자 아버지는 “그 녀석이 레너드 번스타인이 될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모든 아들은 어떤 점에서든 아버지를 거역하고 투쟁하며 떠나지만 결국은 더욱 밀접해지고 확고해져서 돌아온다”는 번스타인의 말에는 아버지와의 오랜 애증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1935년 졸업한 번스타인은 하버드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합니다.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는 만남이 1937년부터 이어집니다. 번스타인에 앞서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었던 지휘자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를 하버드 대학 파티에서 만났고, 같은 해 11월 뉴욕의 피아노 리사이틀에서는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의 옆자리에 앉게 됩니다. 1940년에는 보스턴 심포니를 이끌고 있던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를 만나기에 이릅니다. 번스타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본 쿠세비츠키는 자부심과 놀라움을 섞어 “이 소년은 새로운 쿠세비츠키이자 환생”이라고 격찬했지요. 커티스 음악원에 진학해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를 사사한 번스타인은 23세 때인 1941년 야외 콘서트에서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데뷔하는 동시에, 이듬해인 1942년에는 첫 교향곡인 ‘예레미야’를 완성해서 아버지에게 헌정합니다. 1943년에는 코플랜드의 피아노 소나타를 초연하지요. 피아노와 지휘, 작곡과 편곡 등 음악적 재능이 동시다발적으로 만개한 것입니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엄숙하고 종교적인 유대인 세계와 코플랜드로 대표되는 뉴욕의 현대적인 예술계는 이후 번스타인의 삶을 떠받치는, 거대한 두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聖)과 속(俗), 가족 중심의 보수주의와 지극히 개인적인 자유주의, 이성애와 동성애는 때때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공존하기에 이릅니다.

1943년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임명된 번스타인에게 극적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같은 해 11월입니다. 당초 지휘자로 예정됐던 브루노 발터가 이틀 전 급작스럽게 취소하면서 번스타인이 대타를 맡은 것이지요. 당시 연주회가 방송 중계되고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의 1면을 장식하면서 번스타인은 전국적인 스타로 급부상합니다. 이러한 열광 이면에는 미국에서 나고 자라서 교육받은 첫 지휘자를 배출했다는 자긍심과 ‘유럽 콤플렉스’가 병존했을 것입니다. 1957년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빛을 보고, 이듬해인 1958년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에 취임하면서 번스타인은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습니다. 특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초연 직후 732차례나 연속 공연되고, 1957년 토니 상을 수상하면서 번스타인의 대표작으로 떠오릅니다. 또 뉴욕 필하모닉 취임과 더불어 번스타인은 거슈윈과 코플랜드, 찰스 아이브스 등 미국 작품을 대거 프로그램에 끌어들이고 청소년 음악회를 진행하며 혁신의 기운을 불어넣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비평가 헤럴드 숀버그는 “번스타인의 동작은 당대 지휘자 가운데 가장 춤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꼬았지만, 그 열정조차 새로운 청중 개발에 톡톡한 효과를 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20세기 음악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일찌감치 코플랜드의 좌파 인민주의에 기울었고, 충실한 민주당 지지자로 취임 이전부터 케네디 대통령과 각별한 우의를 보였던 번스타인은 때때로 미국 보수 세력과 길항(拮抗)을 겪기도 했습니다.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1951~52년과 1955~56년 시즌에 번스타인이 뉴욕 필하모닉에서 지휘를 맡지 못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매카시즘의 마녀 사냥이 기승을 부리면서 번스타인의 좌파적 성향과 동성애적 기질, 인종적 태생으로 인해 미국에서 실질적으로 실직 상태를 겪기도 했다”고 기술합니다. 1970년에는 번스타인의 아내 펠리치아가 뉴욕의 아파트에서 흑인 급진파 행동주의 단체인 ‘블랙 팬서(Black Panthers)’를 위한 자선 파티를 여는 바람에 구설수에 휘말려야 했지요. 배리 셀데스 같은 정치학자는 FBI 문서를 토대로 한걸음 더 나아가 번스타인을 정치적 좌파이자 급진적 행동주의자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작곡가로서 그는 1944년 첫 교향곡 ‘예레미야’와 첫 뮤지컬인 <온 더 타운(On the Town)>, 첫 번째 발레 음악인 ‘팬시 프리(Fancy Free)’를 잇달아 발표한 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1957년 초연한 <캉디드>는 두 달 만에 막을 내리는 참패를 겪었지만, “나는 살기 위해 지휘하고, 지휘하기 위해 산다”는 말러의 말은 그대로 번스타인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번스타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차례나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면서 ‘말러 부활’을 일으킨 주역이 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1969년까지 뉴욕 필과 1200회의 연주회와 200여 장의 음반을 발표했던 번스타인은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작곡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11년간 뉴욕 필하모닉에 재직하면서 번스타인이 발표한 곡은 교향곡 3번 ‘카디시’와 ‘치체스터 시편’이 전부였기에 그 열의는 더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작곡가로서 번스타인은 쇤베르크 중심의 음렬주의나 극단적인 실험을 배격했습니다. 그는 “조성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 존재와 정신,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누가 사랑과 우정, 믿음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지요. 대신 그가 자유롭게 넘나든 것은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입니다. 재즈와 흑인 영가를 끌어안고, 오페라와 뮤지컬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행보에 스승 쿠세비츠키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지요. 하지만 번스타인은 “교향곡이 단지 교향곡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노래보다 우위에 서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조성 파괴가 극에 이르렀던 1960~70년대에는 낡고 저속하며 상투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더 이상 뚜렷하지 않은 1990년대에 이르면 ‘외로운 선지자’로 재평가를 받습니다. 이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에게 단 한 명의 숙적이자 라이벌이 있었다면 역시 지휘자 카라얀(Karajan)일 것입니다. 번스타인이 신대륙 미국을 상징한다면 카라얀은 본토 유럽을 대표했고, 번스타인이 말러를 재조명했다면 카라얀은 베토벤•브람스•브루크너로 이어지는 독일 교향악의 전통에 매진했지요. 카라얀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언젠가 번스타인은 “내가 10년 더 젊고, 5센티미터 더 크다는 것”이라고 위트 있게 받아넘겼습니다. 하지만 1989년 카라얀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번스타인은 파리에서 콘서트 도중, 청중을 향해 “동료이자 위대한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추모하며”라고 말한 뒤 묵념을 제안했습니다.

1973년 번스타인의 55세 생일을 맞아 음반사 CBS에서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줬습니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 부부,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 등 당대의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밤이 깊어가자 번스타인은 동료 프로듀서 폴 마이어스의 어깨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숨질 때의 베토벤보다 고작 두 살 어릴 뿐이야. 하지만 나는 기억에 남을 만한 어떤 작품도 아직 쓰지 못했어.” 비록 자신은 제대로 발붙일 분야가 없다고 한탄했지만, 번스타인의 영향력 아래 성장한 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마린 알솝(볼티모어 심포니), 번스타인의 곡을 즐겨 연주한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과 켄트 나가노(독일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등 새로운 세대가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토스카니니처럼 언제나 50여 곡의 같은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인생을 보내고픈 마음은 없다. 나는 지휘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할리우드를 위해서 작곡하고, 교향악을 쓰고 싶다. 나는 훌륭한 단어의 뜻 그대로 음악인이고자 한다.” 이 말처럼 생전에는 지휘자 카라얀의 위세에 눌린 감이 없지 않다고 해도, 사후에는 ‘20세기 음악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음악가. 바로 번스타인입니다.

출처: 김성현의 블로그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84년 역사 동춘서커스 박세환 단장

January 4, 2010 by jasonfolio

`이봉조·허장강·배삼룡·이주일… 연예인 사관학교

“다 떠날 때 왜 남았냐고? 누군가는 지켜야지”

▲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40대 이상의 한국인은 서커스와 관련된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다. 한국이 원조물자에 의지한 채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던 시절, 한국인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서커스와 영화였다.

영화는 나이 제한이 있었지만 서커스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추석이나 설 때 서커스단이 시장 공터에 들어서면 그때부터 마을은 왁자해졌고 이내 돈이 돌았다. 공중곡예, 접시돌리기, 통굴리기, 허리 뒤로 꺾어 입으로 접시 올리기 등…. 상상할 수 없는 묘기의 향연.

코흘리개 꼬마들은 서울 가야 볼 수 있다는 코끼리를 직접 본다는 즐거움에 가슴이 콩닥거렸고, 10대 소녀들은 잘생긴 사회자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몇번을 봐도 또 보고 싶은 게 서커스였다. 동네 꼬마들은 으레 천막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벌어진 틈을 노리곤 했다. 천막만 들추고 들어서면 그곳엔 언제나 놀라운 꿈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최근 동춘서커스가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동춘서커스단 박세환 단장이 지난 10월 “11월 청량리 공연을 끝으로 문을 닫는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84년 역사의 동춘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다고 하자 네티즌들은 정부 당국의 처사를 거세게 비판했다. 아고라 토론방에는 ‘동춘이 문 닫으면 유인촌은 무인촌 된다’ ‘4대강 파기 전에 동춘부터 살려내라’ 등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노동부가 맺은 ‘사회적 일자리 창출 업무 협약’이 동춘서커스에 희소식을 전했다. 이렇게 되면 동춘서커스 단원 15명은 노동부로부터 1인당 84만원을 지원받게 된다. 회생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동춘서커스는 지난 9월 17일부터 12월 15일까지 서울 청량리에서 공연했다. 2010년 1월 12일부터 3월 15일까지 수원에서 공연한다. 지난 12월 7일 오후 청량리 수산물시장 공터 동춘서커스 빅탑. 천막도, 무대도, 객석의 의자도 옛날 그대로다. 남루하다.

문득 한수산의 소설 ‘부초’에 나오는 주인공 명수가 생각났다. 소설이 나온 1977년 분위기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박경애가 부른 노래 ‘곡예사의 첫사랑’의 전주(前奏)가 귓전에 울리는 듯했다.

매표소 겸 사무실로 쓰는 컨테이너에서 박세환(65) 단장과 마주 앉았다. 좁은 공간의 벽면에는 서커스 공연에 필요한 각종 공문서 원본이 붙어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오래된 포스터가 보였다. 바닥에는 전열기와 음료수 상자, 티켓 상자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서커스를 처음 본 게 언제였나. “1959년 동춘서커스가 경주에 왔다. 내가 경주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마침 나는 학교 악대부에 가입해 트럼펫을 배우고 있었다. 그때 사회자는 까만색 양복에 하얀 마후라(머플러)를 걸치고 있었다. 잘생긴 이 사회자는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말을 잘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 사람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의 조부는 당시 경주 지역에서 유지로 통하던 박화준씨. 종갓집의 종손이었던 세환의 가슴에 동춘서커스단의 화려한 무대가 강렬하게 박혔다. 1962년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무작정 동춘서커스를 찾아갔다.

어디서 동춘서커스에 입단했나. “동춘서커스단이 수원 지동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잘하니까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바로 입단하지 못하고 3개월 동안 (연습생으로) 대기시켰다. 가수와 연기자들이 자는 방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3개월동안 기다렸다.”

그때 동춘서커스에 있던 연예인 중 나중에 유명해진 사람은 누구인가. “그때는 심철호, 남철, 남성남, 장항선 등이 있었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어땠나. “경주 콩쿠르대회에 나가면 1등을 했는데 유료관중이 있는 무대에 서니까 전혀 달랐다. 그때 내가 부른 노래가 ‘청춘의 꿈’이었다. 너무 떨려서 박자가 엉망이 되었다. 폴카곡이 트로트곡이 되어 버렸다. 첫 무대는 실패였다. 한동안 무대에 서지 못하다가 손님이 없는 공연에만 무대에 섰다. 그렇게 연습을 한 끝에 1년 만에 앙코르를 받는 가수로 인정받았다. 예명도 박원영(朴元永)이라고 지었다. 스타로 영원하고 싶다는 뜻을 담았다.”

서커스단 소속 연예인들은 돈은 어떻게 벌었나. “당시 모든 서커스단 연예인들은 일당제였다. 월급제가 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모든 공연단은 일당제로 돈을 받는 게 룰(rule)이었다. 일당이 4만원이라고 치면 손님이 많으면 온일당(4만원)을 받고 손님이 없으면 반일당 2만원을 받는 식이었다.”

▲ 동춘서커스단의 곡예 공연.

당시 서커스 연예인은 사회도 보고 배우도 하지 않았나. “얼마쯤 지났을 때 쇼 사회자가 나가 버려 자리가 비었다. 사회자는 귀공자 타입이 마이크를 잡는 게 관행이었다. 나는 사회를 공부했다. 아는 게 많아야 하니 소설책도 많이 읽었다. 사회는 윤일경(훗날 남철)에게서 배웠다. 사회자는 펑크가 나면 원맨쇼도 해야 했고 배우도 해야 했다. 내가 연극 주연을 할 때 장항선이 형사 역할을 맡았다. ‘물레방아 도는 내력’에서는 남철이 마당쇠를 맡았다. ‘원한 맺힌 두 남매’ ‘어머니 울지 마세요’ ‘홍도야 울지 마라’ ‘안개 낀 목포항’ 등에 출연했다.”

동춘서커스단은 전성기 때 단원이 어느 정도 됐나. “내가 입단했을 때는 150명이 넘었다. 무용수만 7~8명이 되었다. 무용수들은 오프닝과 피날레 때 춤을 췄고 중간중간에 캉캉춤이나 차차차를 췄다. 가수도 6~7명이 되었다. 여기에 10인조 악단이 있었다. 곡예팀, 연극팀, 국악팀도 있었다. 여기에 설비·시설팀도 있었다.”

서커스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3년. 일본 고사쿠라 서커스단이 부산에 들어와 서커스 공연을 시작했다. 서커스 열풍이 시작됐다. 동춘서커스단은 1925년에 목포에서 창설되었다. 일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던 박동수(호 동춘)가 독립해 30여명의 조선인을 모아 만들었다. 1930년대 한반도에는 동춘서커스단 등 한국인이 운영하는 서커스단 10여개를 포함해 30여개의 서커스단이 전국을 누볐다.

가수, 코미디, 배우 등 예능에 재질이 있는 청춘들은 모두 서커스단으로 몰려들었다. 광복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서커스 열풍을 선도하고 있던 공연단이 동춘서커스였다. 그가 동춘에 입단했을 때 이미 허장강, 서영춘, 배삼룡, 이주일, 이봉조 등이 동춘을 거쳐간 뒤였다. 당시 동춘서커스단에는 코끼리, 사자, 호랑이 등 동물이 창경원 다음으로 많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승승장구하던 국내 서커스단이 첫 번째로 충격을 받은 것은 텔레비전의 출현이었다. 1963~1964년에 개국한 방송국들은 서커스단에서 키워놓은 우수 인력을 빨아들였다. 배우, 사회자, 연주자 등 A급 단원들은 수입이 불안정한 서커스단을 떠나 안정적인 방송국을 택했다. 그럼에도 서커스단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서커스단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예비 연예인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왜 방송국으로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나. “당시는 한번 주연배우는 줄곧 주연배우 대접을 받았다. 이쪽 바닥은 주연 빼놓고는 다 대우가 형편없다. 나도 MBC 2기 탤런트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때 동춘에서 주연배우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나가서 주연이 못될 바에야 동춘에 있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또 동춘이 마음도 편했고, 내가 빠지면 동춘서커스가 지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웃음) 그때 날 보러오는 여성팬들도 있었다.”

서커스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언제였다고 보나. “1972년 4월 12일부터 TBC에서 드라마 ‘여로’가 시작되었다. 태현실과 장욱제가 나오는 드라마였는데 이 드라마가 인기가 있으니까 저녁에 식사하고 서커스구경 오던 사람들이 TV 있는 집으로 몰려갔다. 그때부터 공연예술 극단이 TV에 밀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인기를 끌었던 국극단도 이때를 전후해 사라졌다.”

1975년 서커스를 떠났는데, 왜 동춘을 그만두었나. “경주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내가 서커스단을 따라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호적 파낸다’ ‘쥐약 먹고 같이 죽자’ 등의 얘기를 하셨다.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춘을 나왔다. 마침 부산 국제시장 안에 있는 부산극장의 선전부장 자리가 나서 그쪽으로 옮겼다. 3년간 선전부장으로 일하면서 인정을 받아 돈을 많이 모았다. 사장님이 영화가 시작된 뒤에 들어오는 관객의 현금 입장료 수입은 전부 내가 갖게 했다. 그때 번 돈으로 부산극장 옆에 생필품 중간도매상을 차렸다. 내가 말을 잘하니까 손님이 몰려와 장사가 잘됐다. 부자가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978년 9월, 인천 간석동에서 공연 중이던 동춘서커스 빅탑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동춘서커스단은 창단주 박동수의 아들 박영조씨가 맡고 있었다. 동춘서커스단이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가 박세환씨에게 들렸다. 박씨는 정신이 퍼뜩했다.

“연극, 국악, 코미디 등 모든 분야의 공연예술이 동춘에 뿌리를 두었는데 우리나라에 그런 서커스단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춘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는 마음에 박영조 단장을 만나러 인천으로 갔다. 그곳에는 서커스단을 사러 온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돈으로 1800만원이었다. 나는 500만원을 선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기로 하고 약 80명의 동춘단원을 인수했다.”

서커스단을 맡은 이후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나. “1980년 8월 KBS 월요기획 다큐멘터리에 동춘서커스 얘기가 방영되었다. 그 직후에 서산에서 공연을 했는데 40일 동안 완전 매진을 기록했다. 아마도 서해안 쪽 사람들은 다 오지 않았나 싶다. 그때 단원들에게 오땅(일당의 5배)도 줘봤다. 빚도 다 갚고 완전히 일어섰다. 남은 돈으로 동물도 샀다.”

▲ 동춘을 거쳐간 스타들. (왼쪽위 부터) 배삼룡, 서영춘, 허장강, 이주일, 이봉조, 남철·남성남, 심철호, 장항선, 정훈희. photo 조선일보 DB

지자체에서 동춘을 초청하려고 경쟁한다고 들었다. “8일 동안 하는 강릉단오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빠졌다. 강릉시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장소를 빌려준다. 돈을 많이 벌어가라고. 2008년에는 강릉단오제가 만석을 이뤘다. 다른 지자체의 축제 때도 초청받는다. 지방 가면 입장료를 5000원으로 할인한다.”

서커스단장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언제였나. “2003년 9월 12일 전남 광양 구시청 마당에서 공연할 때였다. 그날이 추석이었는데 태풍 매미가 상륙하고 있다는 기상예보가 있었다. 천막을 뜯어내면 철골구조물은 버틸 수 있다고 봤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추석날 공연을 할 수가 없어 그냥 강행했다. 그날 아침 바람이 심상치 않아 손님을 다 내보냈다. 11시 반부터 2시간30분 동안 태풍 매미는 빅탑, 조명, 음향기기 등을 다 쓸어가 버렸다. 그러더니 2시부터 날씨가 개기 시작했다. 태풍에 날아가버린 20억 재산 중 조금이라도 건져보려고 재해대책본부에 알아보니 가설물이라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때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서커스 단장으로서 가장 잘못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마케팅 분야를 소홀히 한 것이다. 그게 흥행실패로 이어졌다. 동춘에서 시작한 모든 예술이 발전해 나갔는데, 동춘만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그 결과 전국에 문예예술회관이 160개가 들어섰는데 서커스만 상설극장을 마련하지 못했다.”

2009년 12월, 현재 국내 서커스단은 동춘이 유일하다. 1년 전만 해도 동춘서커스 외에 한국곡예예술단, 서울아트서커스 3개 서커스단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2개가 문을 닫았다. 국내 서커스단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부 곡예사를 중국에서 수입했다. 동춘서커스 역시 ‘중국 기예단 합동공연’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중국 기예단이 없었으면 그나마 동춘서커스는 진작에 문을 닫았을지 모른다. 동춘서커스 단원 50명 중 29명이 중국인이다. 현재 동춘서커스가 지고 있는 부채는 3억8000만원.

동춘서커스 단원의 월급을 공개할 수 있나. “침식을 제공해주고 A급은 300만원, B급은 200만원, C급은 150만원 선이다. 사실 극단에 소속된 연극배우들보다는 동춘 단원들이 훨씬 더 잘 받는다.”

동춘서커스의 오늘을 보면서 캐나다 ‘태양의 서커스’와 러시아 ‘볼쇼이 서커스’를 말하는 사람이 많다. “왜 ‘태양의 서커스’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말한다. 기업에서 초청비의 20%를 지원한 ‘태양의 서커스’는 10만원을 받기 때문에 강남 지역에서만 겨우 된다.

부산에 내려가면 5만원 이상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도 손님이 안 온다. 우리도 정부나 민간 후원을 받으면 그 수준까지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왜 국내 서커스는 빅탑(대형 천막)을 고집하나. “캐나다 ‘태양의 서커스’ 역시 텐트를 가지고 왔다. 빅탑을 고집하는 이유는 기존의 문예예술회관에서는 천장이 낮아 곡예를 보여주기가 어렵다. 또 문화 혜택에서 소외된 농어촌 지역에 가서 공연하려면 빅탑이 필요하다.”

중국을 단체여행 해보면 반드시 상설극장에서 하는 서커스 공연을 보게 되어 있다. “서커스 상설극장이 상하이에 8개가 있고 평양에도 3개나 있다. 라스베이거스에도 상설극장이 많다. 한국에만 서커스 상설극장이 없다. 서커스 없는 관광산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외국의 서커스단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중국 곡예사는 전부 공무원 신분이다.”

각국 서커스의 특장을 소개해줄 수 있나. “공중곡예 분야는 평양교예단이 세계 1위다. 공중곡예를 잘하려면 몸무게 60㎏ 정도가 알맞다. 결국 공중곡예는 한국인에게 맞는 서커스 분야라는 뜻이다. 러시아는 피에로 분야로 서커스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베이징교예단이나 평양교예단의 역사는 불과 58년밖에 안 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서커스 수준이 세계 최고였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공연예술의 한 장르인 서커스가 지속·발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먼저 서커스 상설극장이 세워져야 한다. 서울을 포함해 대도시에 3~4개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계절을 타지 않고 공연할 수 있고 관광객을 불러모을 수 있다. 그리고 서커스아카데미가 설립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서커스 분야에 뛰어들려는 사람들을 꾸준히 키워낼 수가 있다.”

박 단장의 염원은 여러 번 실행 직전까지 갔었다. 서울시는 부지를 제공하고 문화관광부가 경비를 지원해 상설극장을 세우는 안(案)이 만들어져 실행되는 듯하다가 1998년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없던 일이 됐다. 그에 앞서 1995년 8월 당시 강봉균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이 행정쇄신위원장이 되어 ‘동춘서커스활성화 방안 10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서커스 엑스포를 개최하고, 곡예사를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고, 상설극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무척 감격스러웠겠다. “강봉균 실장 앞에서 직접 이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에 서린 한이 풀리는 것 같아 감격해 울었다. 하지만 DJ정부로 바뀐 1999년 유야무야가 됐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동춘서커스는 이름이 있어서 다른 지자체에서도 상설극장을 지어 유치할 만한데. “현재 목포시 의회에서 움직임이 있다. 동춘서커스가 목포에서 창단되었으니까 목포시에 상설극장을 짓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문제는 내가 또 그것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감기환자와 숨 넘어가는 환자가 있다면 누굴 먼저 손을 써야 하나. 숨 넘어가는 사람(동춘)을 치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박 단장은 벽면에 붙어 있는 ‘전문예술단체 지정서’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정부에서 3년만 서커스를 집중지원하면 동춘서커스를 세계적인 서커스로 만들어낼 자신이 있다. 내가 서커스에 몸담은 게 48년이다. 서커스와 관련해 나만큼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없다. 동춘이 전문예술단체로 지정받았으니 우리도 민간기업의 스폰서를 받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태양의 서커스’? 그거 아무 것도 아니다.”

그의 자신감이 허투(虛套)로 들리지 않았다.

출처: 주간조선 조성관 편집위원 maple@chosun.com

畵手 조영남 토크쇼 “무작정 만나러 갑니다” – 만화가 이원복 교수

December 15, 2009 by jasonfolio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조영남과 이원복 교수가 서울 강남 청담동의 레스토랑에서 마주앉았다. 묘하게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처음 출간한 책 가 나온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지만 타고난 입담꾼인 이 교수는 지칠 줄 모른다. 유럽편 6권에 일본·미국·우리나라 이야기까지 덧붙인 이원복 교수가 이제는 중국 역사를 옮기려고 팔을 걷어붙였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 저편에 치열한 워커홀릭이 숨어 있는 모양이다.

를 읽으며 바다 건너 미지의 대륙에 대한 꿈을 키우던 아이들이 이제는 성장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청장년이 됐다. 그 사이 강산이 두어 번 바뀌었고, 나라는 선진국 반열을 넘볼 정도로 성장했다. 그래도 작가는 펜을 놓지 못한다.

“이제 ‘강해진 대한민국’이 보는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죠.”

만화를 그릴 수 있어 행복한 남자, 이원복 교수의 이야기다. 방송국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처음이라는 조영남과 이 교수. 두 사람은 2학번 차이의 대학 선후배다.

조영남 왜 우리가 인연이 없었을까? 웬만하면 한 번쯤 인사했을 법도 한데. 나는 64학번인데.

이원복 저는 선배보다 한 살 어린데 재수해서 66학번이에요. 조 선배는 음대고 나는 공대니 학교에서는 한 번도 못 봤겠죠.

조영남 최근 나는 를 다시 봤는데 처음에 못 느꼈던 것들이 보이더라고.

이원복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지금 그 책을 100% 다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조영남 수정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

이원복 네. 시각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연재하던 당시는 1980년대로 후진국에서 간신히 중진국으로 들어왔을 때여서 지금 보면 너무 선망하는 시각이 많아요. 이제는 우리도 그들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봐야 한다는 거죠. 그들이 가진 것은 우리도 거의 가지고 있거든요.

조영남 통째로 바꾼다는 건가? 그림도?

이원복 네. 대작업이죠.

조영남 누구와 상의하며 집필했어요?

이원복 저 혼자 했죠. 1981년부터 1986년까지 에 연재한 게 유럽 6권이에요. 독일로 유학 가서 연재하느라 만화를 그려 우편으로 보냈죠. 1984년 교수가 되어 귀국한 뒤 15년간은 세계사와 한국사를 학습만화로 그리는 작업에만 열중했어요.

그런데 1997년부터 일본 들락날락하다 보니 일본도 해야 할 것 같은 거예요. 일본편 완성 후에는 우리나라편을 만들었고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우리 시각으로 보는 것보다 다른나라를 쭉 보면서 ‘이 나라는 이렇고, 저 나라는 저런데 우리는 왜 이런가’ 반추해보자는 의도였죠. 한국편 나온 후 제가 뉴욕으로 교환교수로 가있다 보니 이 나라는 또 다른 거예요.

그래서 미국편 3권을 내고 나서 앞으로 는 만들지 않겠다 하고 손을 끊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에서 중국편을 하자고 제안하더라고요. 방대해서 손도 못 댈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이때 아니면 언제 하나’ 싶기도 하더군요. ‘체력이 아직 남아있을 때 하자’는 심정으로, 마치 유작 만들듯 하고 있어요. 청조 말기부터의 근·현대사를 다루죠.

조영남 그런데 유럽편이 느닷없이 네덜란드부터 시작되니까, 이거 완전 웃기는 순서야.

이원복 (웃음)그게 왜 그렇게 됐느냐 하면, 쭉 연재하다 보니 네덜란드편 분량이 적어 100쪽밖에 안 됐어요. 책 한 권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마침 프랑스편을 시작하면서 앞에 100쪽 정도 개괄이 들어갔거든요. 미술사부터 시작해서 프랑스문화 전반을 이야기하는 부분, 그것까지 합치니 딱 1권이 되더라고. 그래서 네덜란드가 1권이 된 거예요.

조영남 이원복이 제일 처음 만든 만화가 뭐였지? 차례대로 이야기해 보자고.

이원복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신문사 주간인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와 같이 신문사에 놀러 갔어요. 친구가 “아버지, 얘가 신문반에서 만화 그려요” 하고 소개했죠. 그러자 친구 아버님이 대뜸 “너 아르바이트 해봐라” 하면서 미군부대에 돌아다니는 명작만화를 베껴오라고 하시더군요.

얇은 종이 대고 그대로 그려오라는 거였죠. 만화는 필요한데 작가한테 맡기면 원고료가 많이 드니까 그랬어요. 제가 그려오면 번역한 말풍선을 붙이는 식이었죠.

네덜란드편이 1권 된 사연, “분량이 모자라서…”

조영남 그러니까 데뷔한 작품은 뭐였지?

이원복 . 월터 스코트의 소설을 명작만화로 만든 미국 작품인데, 제가 그걸 전부 베껴 신문에 낸 거죠. 같은 미국 작품들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일본만화도 베껴오라는 거예요. 일본만화는 대고 그리는 게 아니라 보고 그렸어요. 그렇게 한 3~4년 했죠.

1966년에 대학교 들어가서는 자존심도 있으니 제가 직접 창작했고요. 대학생이다 보니 원고료가 싸서 신문만화 전체를 제가 다 그렸어요. 하루에 3~4개씩 연재했죠. 하나는 이원복, 하나는 이상권, 하나는 성창경, 뭐 이런 식으로 친구들 이름을 필명으로 써가면서요.

조영남 그 밖에 이름을 댈 수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게 있지?

이원복 순정만화·공상만화·명랑만화 등 별 걸 다 했어요. 혼자 방송국 프로그램을 다 만든 셈이지. 그러다 1975년 독일에 가서 이라는 유럽여행기를 이라는 잡지에 연재했죠. 그 이름도 제 동창생들 이름이에요. 나중에 그 작품을 읽어보니 오류투성이더군요.(웃음)

그 다음 1981년에 시작한 게 고, 귀국 후에는 와 를 만들었는데, 이 두 작품은 그림은 안 그리고 ‘콘티’만 썼어요. 만화에서는 콘티가 거의 90%를 차지하거든요.

그 뒤 1987년 6·29 민주화선언으로 좌파·우파 난리가 나자 두산의 박용성 회장이 “자본주의·공산주의가 뭔지 가르쳐 달라”고 해서 송병락 교수와 같이 이데올로기를 만화로 만들었어요. 1990년에 만든 , 이게 최초로 베스트셀러 종합 1위가 된 거예요.

그러다 다시 시리즈를 미국편까지 만들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책 시리즈는 선진국 중심이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왔는데, 진정한 선진국민은 세계를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동안 내가 만든 책이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위주로 편협하게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지역의 이야기도 만화로 만들고 싶어져 를 쓴 겁니다. 발칸반도편·중동편·동남아시아편으로 구성돼 있죠. 또 중국편을 시작하면서 도 뒤집어엎자는 생각에 다시 만들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아직 ‘오프 더 레코드’예요.(웃음)

조영남 고등학교 시절부터 합하면 거의 50년이구먼.

이원복 반 세기죠.

조영남 역사를 한눈에 관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교육 시스템도 보편적 역사를 최소한만 가르치는데, 사실 우리도 학교 다녀봤지만 건성건성이잖아? 역사만화를 그리면서 이원복 개인의 삶을 개척했을 거 아니오. 당신은 나보다 어떤 점에서 위대하지?

이원복 없죠. 그래서 가끔 선배가 부러울 때가 많아요. 조 선배님이나 저나 소위 ‘딴따라’ 기질이 강해요. 비슷한 게 많아요. 선배도 화수(畵手)라고 해서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는데, 사람들도 저한테 꼭 물어봐요. 왜 그렇게 이 분야 저 분야 왔다갔다 하느냐고. 그런데 사실 저는 만화나 건축이나 디자인이나 똑같다고 생각해요.

종이에 없던 것을 그리는 거잖아요? 내 아이디어, 내 꿈을 그리는 거죠. 다만 건축은 제한이 많아요. 무너지면 사람이 죽으니까. 만화는 그럴 염려가 없으니 자유롭잖아. 그래서 친구들이 부러워해요.

조영남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하필 역사냐’ 바로 이거야. 왜 그 역사의 흐름을 탔느냐는 거지.

이원복 문화충격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1975년 독일에 갔어요. 1974년 서대문에서 구파발 가는 일직선 도로를 건설하는데 그 위에 독립문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옮기라”고 지시해 이 문화유적을 들어 옮긴 거죠. 역사의식이 겨우 그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맞는 것이었어요. 덕분에 오늘이 있는 것이고요.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희생되는 부분도 생기니까요. 우리나라가 발전하니 청계천도 복원하고 옛 모습이 다시 살아나잖아요?

독립문 옮기는 한국과 돌길도 남겨두는 독일

조영남 나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한강변을 지나는데 모든 집이 한강 쪽에 부엌을 만들었더라고. 한강이 북향으로 보이니 전부 다 창문 작게 만들고 부엌을 내 버린 거야. ‘뷰(view)’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거야. 그래서 나는 동작동 현대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창문을 크게 만들었어.

이원복 그 점도 저와 똑같네요. 1988년 장미아파트 56평짜리를 샀는데 그걸 고른 이유가 딱 하나였어요. 강변이 보이거든요. 한강다리 10개가 보이는 서울 시내 유일한 장소였어요.

조영남 아니, 이 교수. 강 경관이 중요하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 배웠어?

이원복 외국 가보면 집값 제일 비싼 곳은 경관이 좋은 집이잖아요? 정말 그때는 강북이든 강남이든 강바람 춥다고 창을 조그맣게 냈죠. 내가 장미아파트에 이사가서 다 헐어버리고 통 유리창을 만들었어요.

조영남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돼.(웃음) 내가 미국 가서 안 봤다면 지금같이 강변의 좋은 집을 고를 수 있었겠느냐고.

이원복 그렇죠. 아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그런 1970년대에 제가 독일에 갔는데 동네마다 역사가 보이더라고요. 마차가 타고 지나간 돌로 된 길 위로 사람이 다니고, 괴테가 시를 쓴 방이 여태껏 남아 있어요. 우리는 식민지 잔재부터 시작해 역사란 잊어버리고 없애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유럽에 가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역사를 재발견한 거죠.

조영남 오랜만에 말귀 알아듣는 사람을 만났네. 최근에 와인 관련 책도 냈던데, 왜 관심을 갖게 됐지?

이원복 원래 책 쓸 생각은 없었고, 마시는 것만 좋아했어요. 어느 날 보니 와인을 다룬 일본만화가 들어와 이 문화를 왜곡하고 있더라고요. 일본사람들은 사실 알게 모르게 뼛속 깊이 사무친 서양 콤플렉스가 있어요. 프랑스·독일이라면 껌뻑 죽어. 자기 돈 내며 사는 와인을 완전히 경배하면서 마시더군요.

고급문화의 상징처럼 미화하는데, 그거 아니거든요. 술은 술이지. 독일 유학시절 돈이 없어 맥주만 마셨어요. 나중에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면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죠. 미국에 가니 술만 따로 파는 가게가 있는데, 그 넓은 데가 와인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아, 와인이 이렇게 대단한 거구나” 싶었어요. 10달러, 20달러짜리 홀짝홀짝 마시면서 와인을 익힌 거죠.

조영남 역사를 배우면 그만큼 써먹을 데가 있어. ‘왜 인간이 저렇게 사느냐’면서 관조할 수도 있고 말이야. 내가 이 늘그막에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왜 우리는 역사가 증명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꼭 다시 반복하는 거지?

이원복 잊어버려서 그런 게 아닙니다. ‘나이니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조영남 캬~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니까?

이원복 나폴레옹도 그렇고, 히틀러도 그렇고… 역사의 실패가 항상 반복된 것은 ‘나이니까’라는 생각 때문이죠. 이 억겁을 통해 딱 한 번 사는 인생, 남들은 몰라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자기에 대한 확신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그래요. 저도 제일 충격을 받았던 것이 대학교 떨어져 재수한 일이었어요.

조영남 당시 경기고 나와서 대학교 떨어진다는 것은 무지하게 콤플렉스 아니에요?

이원복 사람 취급 못 받았지. 그때 경기고등학교를 480명이 졸업했는데 360명이 서울대에 갔어요. 그때 받은 느낌이 그거에요. ‘나인데도?’ 남도 아니고 내가 떨어지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물론 재수하며 얻은 것도 아주 많아요.

조영남 그런데 왜 하필 건축과예요?

이원복 사실 내가 문과 기질이나 딴따라 기질이 많아요. 시도 좋아하고 별별 것을 다했지. 그런데 우리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공주의라고 해서 경기고 나와 서울대 공대 못 가면 사람 취급을 안 하는 분위기가 많더라고. 나는 대학 떨어졌으니 3수를 해서라도 서울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갈 데가 없어. 건축과 학생 하면 화이트 칼라에 머리에는 포마드 쫙 바르고, 언덕 위의 하얀 집 그릴 줄 알고, 그래서 건축과를 선택했지. 한데 웬걸, 물리·화학·방정식·미적분만 시키는 거예요. 초반부터 F학점으로 쫙 깔았죠.

조영남 내가 보기에는 시인 이상도 건축과를 갔던 게 당시 다른 선택권이 없어서 그랬던 거야. 수학에 또 천재였으니까. 내가 이원복을 위해 변호해야 해. 통찰력이 없으면 만화를 못 그려. 전체를 다 볼 수 있어야 해. 역사만화를 그리려면 역사를 축약해 그려야 하잖아?

머리 나쁜 사람은 그걸 못해. 만화가가 위대한 것은 같은 축약이라도 재미를 넣는다는 점 때문이야. 아주 창의적이지. “너 만화 그리냐”는 말이 “너 웃기냐”는 말과 같게 쓰이잖아? 잘못된 편견이야.

이원복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요. 1984년도에 교수로 부임했는데 동료교수가 “교수가 만화 그리는데, 괜찮아요?” 그러더라고. 사실 엄청나게 많은 미대 교수들이 먹고살려고 만화를 그렸어. 절대 비밀로 했지. 저는 반대로 오자마자 만화 그린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더니 딴죽 거는 사람이 없어요.

배고프던 시절, 만화로 인해 자유로울 수 있었다

조영남 만화 그리던 시절로 돌아가보자고. 초등학교는 어디서 다녔어?

이원복 세 군데를 옮겨 다녔어요. 대전에서 2년, 마포에서 2년, 동대문초등학교에 2년 다녔죠. 집이 못사니 단칸 셋방으로 이사를 다닌 거지. 저는 가난이 뭔지 진짜 알아요. 다만 원한으로 안 삼았다뿐이지.

조영남 그래서 고등학교 때 만화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로군. 나도 고 3때 미술부장 하면서 교지 표지부터 삽화까지 다 그렸어.

이원복 저도 중학교 때 미술부 하다 집어치웠어요. 다른 애들은 일제 도구 들고 다니는데, 나는 도구 살 돈조차 없는 거야. ‘쪽 팔려서’ 못 나갔지.

조영남 고등학교 때 신문사 만화 아르바이트를 했으면 돈맛을 알았겠다, 그렇지?

이원복 그렇죠. 고등학교 때부터 누구한테 1원 한 장 받아본 적이 없어요. 내가 금전적으로 자유로우니 가족 누구도 내게 간섭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정말 자유롭게 살았어요. 마누라한테만 빼고.

조영남 지금은 사람들이 당신을 역사만화 그리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만화가라고 하기에도 좀 그래.

이원복 많이들 물어봐요. 교수로 불리기를 원하느냐, 만화가로 불리기를 원하느냐? 나한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실 직업적으로는 만화가가 훨씬 좋아요. 정력적이고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이거든. 나는 원래 태생이 만화쟁이고.

조영남 다시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자고. 문화적 충격 때문에 역사에 주목했다는 거지?

이원복 독일에서의 경험도 그렇고 제가 하는 만화는 소위 교양만화라고 해요. 그림만 보면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이 엄청 많은 거야. 콘텐츠로 ‘맞짱’을 뜰 수밖에. 그러다 보니 제일 무궁무진한 소재가 역사예요. 파고 파도 끝이 없거든. 중국의 청조 역사만 가지고 500쪽짜리 책이 4권이 나와요.

조영남 유럽문화를 보고 역사공부를 시작한 건가?

이원복 공부했다기보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다 공부가 됐어요.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온 아이들과 맥주를 마시며 놀다 보면 내가 전혀 모르던 그들의 역사 이야기가 나와요. 정권 치하에서의 저항운동, 스탈린 이야기 등. 당시 유럽에 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여행을 했어요.

지금 아니면 못 간다 그러면서요. 가난한 학생이니 차 한 대 가지고 유럽을 돌며 못 가는 나라 빼고 다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종합적인 역사가 보이더군요. 스페인이 유럽 제일 서쪽인데 동양적 분위기가 많아요. 왜? 이슬람이 700년이나 지배했으니까. 궁금한 것은 찾아보고 물어보면서 산발적인 지식이 꿰어져 목걸이가 되더군요.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유럽 역사의 특징이에요.

조영남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민족이 되도록 만든 걸까?

이원복 순혈주의. 우리나라 책을 쓰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생각했는데, 지리적 위치 때문인 것 같아요. 왜적 침입이 3000번 이상이었는데 왜구·몽골·여진족·말갈족 등이 우리나라를 짓밟았죠. 만약 이들에게 흡수됐다면 우리나라의 정체성 자체가 사라졌겠죠. 살아남기 위해 가능하면 외국인을 막고, 다른 핏줄을 배제한 것입니다.

조영남 당신과 나는 지금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요순시대를 살고 있는 거야. 그거 알고 있었어요?

이원복 그럼요. 제일 행복하죠. 인류 역사 5000년 과정을 한 인생에 한꺼번에 겪는 세대예요. 원시시대부터 농경·산업사회까지. 우리나라 50, 60대들은 짚신부터 발리 구두까지 신어본 세대예요. 조금만 노력해도 쑥쑥 빨리 크는 시대였지. 요즘 아이들은 이미 파이가 작아졌기 때문에 우리만큼 행복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조영남 내가 잠시이기는 해도 통일 조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더라고. 내가 태어난 후 6년 동안은 38선이 없는 통일 조국 삼천리 강산이었어. 나 자신이 기막힌 역사적 인물인 거지.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했는데, 그 느낌은 언제 받은 거야?

이원복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요. 다만 정치수준이나 몇 가지는 빼고요.

“앞으로는 동양의 가치가 평가받는 시대 올 것”

조영남 나와 참 생각이 비슷하다. 정치판에는 예의도 없고 배려도 없어. 정치인들이 총리를 다그치면서 희희낙락한다는 것이 선진국 수준이냐고? 어떻게 우리가 이만큼 성장했는지 모르겠어.

이원복 제가 볼 때는 기업들 덕분이에요. 제가 1989년에 처음 소련에 가서 놀랐던 게 있어요. 당시 안보문제 이런 것 때문에 못 가던 시절이었는데 “공산주의 국가 현실을 안 보고 어떻게 비판하느냐”고 주장해서 가게 됐죠.

한국 국민은 그 나라 발도 못 들이던 시절인데 모스크바 공항 카트마다 ‘삼성’ 이름이 다 박혀 있더라고요. 기업은 국민이든 정부든 훨씬 앞서 나가게 되어 있어요. 생존해야 하니까. 요즘에는 세계 어디를 가든 현대·삼성·LG 브랜드를 볼 수 있죠. 그런 것을 보면 기업들이 참 고마워요.

조영남 그거 한마디 이야기해줘. 우리나라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

이원복 우리가 특정 나라를 롤 모델로 하는 시기는 이미 지난 것 같아요. 이미 강력한 국가가 됐지만 선진국이라고 보기 힘든 부분 중 하나가 예의 없는 국민이라는 점. 이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거든요. 술에 취해 경찰에 덤비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조영남 미국에서는 경찰이 눈 내리깔라고 하면 그대로 해야 해. 덤비지 못해.

이원복 공권력에 권위가 있는 거죠. 우리가 반드시 갖춰야 할 부분이에요. 앞으로 10년, 20년 이내에 나타날 가장 중요한 화두가 ‘동양의 재발견’이에요. 동양적 가치가 각광받는 시대가 온다는 거예요. 서양이 동양을 추월한 것은 1776년이라고 봅니다. 그 전에는 세계경제의 3분의 1을 중국이 차지했고, 모든 부가 동양과 중동권에서 나왔어요.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오고 미국의 독립선언이 나와요. 서구식 자본주의가 본 궤도에 오르고 시민민주주의가 제 자리를 잡았다는 거죠. 그런데 그게 200년 남짓밖에 안 돼요. 실제로 150년 동안 대영제국이 등장하며 세계를 완전히 재편해 버리잖아요. 요즘에는 미국 발 경제위기로 인해 서구식 가치가 다시 무너지고 있어요. 그것을 대체할 가치가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 의식을 중시하는 동양적 가치라는 거죠.

조영남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 역사학적 시각에서 보아도 개인에게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이원복 글쎄…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 아닌가? 저는 굉장히 낙천적이에요. 어떤 일이 생겨도 ‘그럴 수 있지 뭐. 재수 없네’ 이런 식.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하는데, 낙천적으로 생각하면 편해요.

조영남 오늘 이야기하면서 생각해 보니 대한민국, 정말 재미있는 나라야.

이원복 세계에 유례가 없는 나라예요.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 20가지’ 이걸 주제로 강의한 적도 있어요. 서양 사람들이 처음 한국에 오면 입국하는 순간부터 놀라워 입을 딱 벌리고 나온다는 거야. 유명하지도 않은 나라 공항에 프로펠러기 한두 대쯤 있는 줄 알았는데 세계 최고의 공항인 거지.

서울에 진입해서는 한강 보고 또 놀라지. 도심을 흐르는 강 중 가장 넓은 강 중 하나가 한강이거든요. 또 그 강변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를 보면 기절한다고. 게다가 그 차의 95%가 국산 차, 게다가 더러운 차가 하나도 없이 다 깨끗하니까.

조영남 내가 운전면허를 잃어버려서 경찰서에 갔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경찰서에 갔는데, 글쎄 “조영남 님, 맞으시죠?” 확인하고 따닥따닥 치더니 5분 만에 모든 게 다 처리돼.

이원복 독일 대학에서 증명서 하나 떼려면 며칠이 걸려요. 담당자가 없다느니 휴가 갔다느니…. 그런데 독일 애들이 한국에서 증명서 떼려고 보면 아예 자판기처럼 자동화 설비가 되어 있어. 대단해요.

조영남 마지막 회를 진행하는 마당에 마침 정말 코드가 잘 맞는 친구를 만났어. 나와 생각이 너무 잘 맞아. 나도 밑바닥부터 지금의 대한민국까지 다 살아봤잖아?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 예쁜 여자들 두고 떠나가는 것은 좀 서운하지만.

출처: 기획·정리 박미소 월간중앙 기자 [smile83@joongang.co.kr] 사진 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presscom@hanmail.net]

신주쿠 사건, 新宿事件 (2009)

November 24, 2009 by jasonfo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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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or: 이동승

처음에는 좀비영화인줄 알았다. 영화안내기를 다시 본다. 좀비영화는 아닌데… 일본의 어느 해안가. 무더기의 인간들이 난파한 배를 뒤로하고 좀비영화로 착각할만큼 떼를 지어 해변을 서성이는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사실 그들은 일본으로 불법 입국을 시도하는 한 무리의 중국인들. 먹고 사는것이 너무나 힘들어 일본으로의 불법체류를 시도했고, 다른 문화 일본에서 그들만의 문화적인 성장통을 겪는 중국인들의 이야기.

어설프다. 나이든 성룡이 주인공이여만 하는 것 또한 어설프다. 그만의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도 않은 영화 ‘신주쿠 사건’. 한 배우가 그만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뭐, 흠이야 없겠지만, 그러기엔 성룡이란 배우는 너무 멀리 갔잖은가.

남한산성

November 24, 2009 by jasonfolio

남한산성

저자: 김훈

무척 재미있다.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를 꽤 흥미롭게 읽을때,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는 송시열도 인조임금과 같이 있었단 얘기를 듣고 김훈의 ‘남한산성’ 이란 책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김훈의 ‘남한산성’ 에는 송시열이 없었다. 당시 송시열의 직급은 너무 낮았고, 더군다나 기회주의자 송시열에게는 목숨이 앞다갔다 하는 그런 자리에, 주화파든지, 척화파든지 발을 들여놓기에는 그의 셈이 너무 빨랐을것이다. 다만 주화파의 최명길과 척화파의 김상헌 만이 자주 등장한다.

각설하고, 청의 2대 황제 홍타이지가 조선의 왕에게 군신의 예를 요구한다. 그런 청의 요구를 조선은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고… 청의 대군앞에 군관들은 모조리 도망하고, 국력은 X도 약한, 자존심만 대쪽같던 조선은 임금을 비롯하여 대신들과 더불어 병자년 엄동설한에 피난이랍시고 남한산성에 기어들어가 돼도않는 말들을 씨부리며 버티다가, 청군의 본격적인 위협앞에 급기야 인조는 성에서 기어나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삼배를 올리게 되는것으로 이야기는 끝이난다.

기자 출신 김훈이라는 선입견때문인가. 처음 대하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은 굉장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런것을 ‘삼인칭 시점’ 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